고기는 굽는 게 제일이고, 모름지기 생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지글지글 불판에 굽는 걸 으뜸으로 치는 까닭에 냉삼 열풍 속에서도 수많은 핫한 고깃집들을 외면해 왔었다. 쌈을 안 먹는 건 아니지만, 굳이 다른 반찬이 없더라도 고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주의라 이것저것 채소 따위들과 이렇게 저렇게 먹는 냉삼집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특히 냉동 주제에 싸지 않다는 게 오래도록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변덕이 생겨 한번 먹어보고 싶어졌다.
냉삼 열품이 조금은 사그라들었음에도 여전히 잘 나가는 냉삼집 몇 군데를 추렸고, 그중에서도 오며 가며 눈에 익은 잠수교집을 가보기로 했다. 간판이 너무 새거 느낌이라 더욱 꺼리던 곳이었는데, 여길 찾아가는 날이 올 줄이야...
잠수교집은 서울에 지점이 여럿 있었고, 본점은 용산 즈음에 자그마하게 있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냉삼을 먹자고 웨이팅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서, 두 지점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는 석촌동을 찾았다. 왼쪽이 잠수교집 4호점이고, 오른쪽이 3호점.
두 군데 중에 하나는 자리가 있겠거니 해서 그런 거였는데, 도착했을 땐 3호점은 불이 꺼져 있었고, 4호점만 문을 열고 영업 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도 그런 걸 보면, 한 군데는 저녁부터 여는 거려나?
식당은 다행히 여유로워서 바로 들어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유행도 절정은 지났고, 대낮부터 냉삼을 얼마나 먹겠냐 싶겠지만, 식사하는 동안 손님이 점점 불어나더니 이내 저녁 못지않은 분위기가 되었다.
옛날 냉삼은 누린내 나는 애매한 고기였는데, 요즘엔 신선한 고기를 급랭시킨단다. 옛날엔 고기 자체가 애매하니 이것저것 곁들여서라도 그나마 먹을만하게 먹는 음식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냥 더 맛있자고 함께 먹는 느낌이다. 저렴한 서민 음식을 재해석해서 모양만 비슷하게 흉내 낸 것 같기도 해서, 뭔가 오묘한 기분. 이런 게 소위 뉴트로라 통칭되는 유행의 맥락이 아닌가 싶다.
주문을 하고, 한 상 차려진 걸 보고는, 이 집의 컨셉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호일 깐 불판에, 시골스런 꽃 쟁반, 델몬트 병까지. 맛을 떠나서 일단 사진 찍는 재미를 이미 잡아버렸다.
이게 냉삼을 시켰을 때의 기본 차림 + 대선 5,000원
급랭 삼겹살 1인분 160g 14,000원
고기를 대접에 담아주면서 그램 수가 찍힌 가격표를 붙여서 갖다 준다. 대패삼겹살보다는 두껍고, 어린 시절 먹던 냉삼보다는 얇은 듯한 두께.
호일이 깔린 불판 위에 빼곡하게 깔아 두고, 함께 준 양념을 톡톡 쳐서 구워 먹는다. 외양은 후추 통이지만 후추 말고 이것저것 더 넣어 섞은 듯. 그걸 숨기려는 의도도 없는지, 개봉감 물씬 풍기게 청테이프로 막아놨다.
쟁반에는 함께 먹을 이것저것이 놓여 있다. 상추랑 깻잎처럼 쌈 싸 먹을 재료부터, 계란말이랑 파절이, 무생채, 마늘쫑, 마늘, 김치 등 구워 먹을 거랑 쌈장, 기름장, 새우젓, 고추장, 날계란 등 찍어먹을 것까지 알차게 담겨있는 한 쟁반. 의외로 구색 맞추기용이 없고, 다 먹을만하다.
갓김치, 백김치, 배추김치, 파절이, 무생채, 마늘쫑, 마늘 순으로, 아래에서 위로 빙 둘러서 고기와 함께 구워 먹는 시스템.
미나리, 고사리, 꽈리고추 小 4,000원
어느덧 냉삼 짝꿍이 되어버린 미나리는 기본으로 나오지 않아 따로 주문했다. 이것도 붉은 플라스틱 소쿠리에 담겨 나와. 진짜 설정에 진심이다. 구워 먹어서 나쁠 리 없는 삼총사.
찌개가 괜찮다기에 찌개도 하나 시켜봤다.
얼큰비지짜글이 8,500원
꽤나 자극적이어서 이건 별로였다. 쫄면 사리 추가가 된다는데, 그건 궁금하긴 하다만, 다음엔 굳이 안 시킬 듯.
벽에 "날계란을 풀어서 구운 삼겹살과 구운 파절이를 함께 집으신 다음 스끼야끼 식으로 날계란에 찍고, 새우젓과 구운 마늘쫑을 올려 먹으라"는 설명이 붙어있기에 시키는 대로 해봤다. 괜찮긴 했는데, 계란에 찍는 게 특별히 의미가 있는진 잘 모르겠더라.
급랭 특알목살 1인분 160g 15,000원
왠지 삼겹살보다 별로일 것 같지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주문한 급랭 목살. 한 점이 큼직해서 삼겹살에 비해 양이 적은 기분이다.
마법의 가루를 후춧 후춧. 역시나 예상대로 냉삼이 나았다. 냉동인 데다 기름기가 없으니 뻣뻣한 느낌.
그래서 계란을 입혀서 명절에 전 부치듯 부쳐 먹어봤는데, 보다 촉촉해지고, 계란의 고소함도 더해져서 낫더라.
남은 목살은 모두 계란 입혀 부쳐먹었다. 계란은 이렇게 쓰면 되는 거여쒀 ㅎㅎ
그야말로 반신반의했는데, 인기 있는 이유가 납득이 가는 식사였다. 고기가 얇고, 곁들이는 것도 많아서 많이 먹게 된다는 단점 아닌 단점이 있지만, 종종 별미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번 식사의 결론은 "두툼하고 질 좋은 생고기가 최고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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