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갑자기 조퇴를 할 수 있게 된 김에 주말엔 가기 힘들다는 식당을 급 방문했었다.
목적지는 라프란스. 공간이 넓지 않은데, 주말에도 딱 토요일 하루만 영업을 하니 더 손님이 몰리는 모양이었다. 일요일부터 화요일까지, 무려 3일이나 쉰다. 주 4일 영업. 검색하면 행궁동 식당으로 나오지만 엄밀히 말하면 행궁동은 아니다.
회사에서 버스를 타니 창룡문, 연무대 정류장에 내려서 753m를 걸어가라 했다. 생각보다 버스를 오래 기다린 바람에 분주히 걸음을 옮겨야 했다.
간판 없는 식당. 으레 간판이 없다고 하면 찾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덩그러니 우뚝 건물 하나가 있어 다급한 와중에도 가게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따뜻한 저녁햇살이 식당 분위기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협소한 공간"이라고 해서 많이 좁겠거니 했는데, 테이블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면적의 절댓값이 작은 느낌은 아니었다.
부랴부랴 당일 예약을 해서 마지막 자리를 잡았던 건지 바 구석 자리를 안내받았다.
그야말로 오픈 주방. 조리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지켜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자리는 무려 식기들과도 함께하는 자리. ㅋㅋ
앉은자리가 자리다 보니 조리도구에도 눈길이 갔는데, 천장에 걸려있는 마들렌 틀이 보였다. 디저트 메뉴는 따로 없던데, 한 적도 있었으려나?
우리가 식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테이블 자리엔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기 앉아서 먹던 꼬마에겐 라프란스가 어린 시절 추억 속의 동네 맛집이 될지도 모르겠다. ㅎㅎ
메뉴는 이따금씩 바뀐다고 들었다. 요즘 음식값이 워낙 올라서 반년 사이 가격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싶어 찾아봤는데, 메뉴가 바뀌긴 했지만 가격은 비슷한 듯했다.
물컵이 야트막한 게 특이하다.
와인소다 4,500원, 우롱차 3,000원 (only ice)
여름날에 어울리는 시원한 음료들. 더 시원해 보이게 투명한 유리잔에 담겨 나왔다.
와인과 레몬, 로즈마리가 들어간 와인소다. 로즈마리 잎이 오동통하니 유독 싱싱해 보였다. 난 로즈마리를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이게 또 은근 잘 어울리는 데가 있다. 이 음료도 그러했다. 상큼하면서도 개운한 느낌이 식사에 곁들이기 좋았다.
복숭아 치즈 샐러드 10,000원. 딱딱이 복숭아, 마스카포네 치즈, 유기농 올리브유와 흑후추
무화과도 들었는데 왜 안 써놨지? 덕분에 고급진 느낌이 산다. 마스카포네치즈는 짜거나 달거나 하는 특별한 간이 없는 편이라 푹푹 퍼먹기 좋다. 버터보다 가벼워서 부담스럽지 않달까? 예전에 사과조림을 만들었을 때 함께 잘 먹었던 터라 과일과 함께 내면 찰떡이겠다 싶긴 했다. 하지만 후추와 올리브유, 거기에 딜을 올린 건 굉장히 생경한 조합이었다.
2021.02.11 - [食食 얌냠] - 요리 - 사과조림
찐득하고 크리미한 마스카포네 치즈와 사각사각 딱딱한 복숭아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나온 조합일 테지만, 취향 탓인지 말랑 복숭아도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복숭아보다 무화과와 더욱 잘 어울렸다.
마침 집에 딱복이 있어서 흉내 내 봤다. 복숭아를 썰어서 올리브유 살짝 치고, 후추 드륵드륵, 소금 아주 약간 해서, 냉장고 안에 은둔 중이던 필라델피아 크림치즈랑 같이 먹었는데, 아쉬운 대로 괜찮았다. 물론 물복에 마스카포네 치즈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메인 요리. 메뉴가 계속 바뀌지만 커리와 오일파스타는 항상 있는 듯했고, 이 조합으로 많이들 먹더라. 그냥 메뉴판만 보고 카레 하나 고르고, 나폴리탄은 별로 취향이 아니라 명란 파스타를 골랐더니 다들 먹는 조합으로 먹게 됐다. 메뉴 종류가 많진 않아서 메뉴를 고르는 데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파스타 한 가지 빼고 이 식당의 식사 메뉴를 전부 시켜 먹은 셈이다.
명란 새우 오일 파스타 15,000원. 새우, 백명란, 그라나파다노 치즈, 마늘과 닭육수로 맛을 낸 오일 파스타
두절탈각새우가 두둑하게 들어간 명란 새우 오일파스타. 뭔가 홈메이드 느낌이 나는 게 재밌었다.
치킨 마살라 커리 9,000원. 국내산 닭고기, 천연 향신료, 토마토 페이스트, 무가당 요거트, 볶은 양파로 맛을 낸 매콤한 인도식 커리와 라이스, 고수, 당근라페, 올리브
요거트로 부드러움을 더한 치킨 마살라 커리. 보기보다 적은 양은 아니었다.
치킨 피타 브레드 4,500원. 모짜렐라치즈를 채워 그릴로 구운 납작한 모양의 빵 (그냥 드셔도 맛있고 마살라 커리와 잘 어울려요)
커리에 치즈를 추가하는 대신 주문한 치킨 피타 브레드. 치즈가 쭉쭉 늘어나는 따끈한 빵은 언제나 옳지.
복숭아 샐러드가 가장 마음에 들었고, 커리와 빵도 괜찮았고, 파스타는 애매한 구석이 있었지만 튼실한 새우가 두둑하게 들었다. 무엇보다 가격이 큰 메리트다. 식사를 하면서 '가격은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은 '이 가격'을 구현한 느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보니 식당 출입문에 "예약자 외 재료가 소진되었다"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었다. 워크인이 가능하긴 하지만 가고 싶다면 미리 예약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 선호하는 식재료나 메뉴가 아니었는데도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기분 좋게 잘 먹었다. 뭔가 감성이 채워지는 느낌이 드는 저녁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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