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막걸리라고 다 싸진 않지만, 만원이 넘는 막걸리를 다양하게 판매하는 술집이 흔하진 않다. 가뜩이나 막걸리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가격마저 착하지 않으니 평소라면 거를 집이었겠지만, 어쩐 일인지 호기심이 동해 찾아보기로 했다.
가게 이름은 7.8(칠점팔). 안국점이라고는 하지만 안국역에서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건 아니고, 종묘 쪽으로 좀 걸어야 한다. 익선동에서 안국역 방향으로 살짝 벗어난 어딘가.
간판은 딱히 없고, 창문에 스티커가 수두룩하게 붙어 있었다. 지도 앱 덕에 어렵지 않게 보물찾기 가능. 진짜 스마트폰 없을 땐 식당 어떻게 찾아다녔더라?
주택 느낌을 살리긴 했는데, 시커먼 테이블과 높은 의자로 채워진 내부는 펍(pub)이나 바(bar) 같은 인상을 준다. 천창에 유리창을 내서 하늘이 고스란히 보이다 보니 나름 쾌적하게 야외 느낌을 낼 수 있어 재밌었다. 늦은 오후 들어오는 햇살도 좋았지만, 눈이나 비가 와도 운치 있고 좋을 것 같다.
각 자리에 놓여있는 메뉴판에는 메뉴들과 함께 7.8 이용 가이드가 인쇄되어 있었다. 칠점팔만의 특이점인 막걸리 샘플. 시간 간격을 두고 직원이 매장 구석구석을 다니며 막걸리를 맛 보여 주시는데, 샘플로 마신 막걸리를 주문하면 보육원에 일정 금액 후원을 한단다. 그래서 맛본 막걸리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주문하자 마음먹었는데, 아쉽게도 이번엔 실패했다. 다음엔 성공할 수 있으려나?
항상 웨이팅이 있는 편이라 테이블당 이용시간은 2시간 30분으로 정해져 있다. 만석이 아닌 경우에는 6시간도 가능하고, 취침도 가능하다는데, 여러모로 한동안은 그런 날이 오진 않을 것 같다. 막걸리 샘플들도 이것저것 마셔보고 갖가지 막걸리랑 음식들도 느긋하게 먹기에 주어진 시간이 그리 넉넉하진 않다. 게다가 음식 포장도 안 되니 먹을 만큼만 시켜서 정해진 시간 내에 부지런히 해치워야 한다. 개인적으로 주문한 음식 남는 꼴을 못 보는 편이라... ;)
주종은 막걸리를 비롯한 한국술이 태반인데 안주가 퍽 이국적이다. 외국인이 하는 가게라 그런지, 접근이 신선하다. 대체 이걸 왜 막걸리랑 먹나 싶은 것들이 눈에 띄는 게 재밌다.
기본 안주인 샐러드. 추가는 1,000원. 채 썬 양배추 위에 된장야채볶음을 올려주는데, 불맛도 나고 매큼하고 짭조름한 게 어딘가 중국풍이다.
Drinks 막걸리 - 팔팔(88) 13,000원. 2021년의 기대주 88년생 89년생 듀오의 막걸리. 750㎖ 6도
메뉴판曰 많이 팔린 막걸리 순위 3위에 빛나는 88. 정제수와 김포금쌀, 국, 산도조절제와 효모 외에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프리미엄 생막걸리로 김포산 김포금쌀만을 사용해서 만들었다는데, 밥을 지어도 맛있는 쌀로 술을 만든 모양이다. 메뉴판을 찬찬히 보며 눈에 들어온 막걸리 중 인기 순위에 있어 시켜본 거였는데,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름도, 라벨 디자인도 영 애매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는데, 맛을 보는 순간 '역시 많이 찾는 덴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달큼하면서도 깔끔해서 시원하게 마시기 딱 좋았다. 이날 마신 막걸리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팔팔막걸리와 함께 할 안주는 칠점팔의 대표메뉴인 바질감자전으로 정했다.
Dishes 바질감자전 20,000원. 해쉬브라운 느낌의 감자전. 베이컨과 치즈, 건바질 등이 들어간 7.8의 대표 메뉴
감자전도 좋아하고, 바질도 좋아하지만, 그 둘을 섞는 건 쉬이 상상이 가질 않았는데 이렇게 나오는 거였구나. 감자를 채 썰어 부친 거라 우리가 흔히 먹는 한국식 감자전보다는 유럽식 감자전인 뢰스티에 가깝다. 튀기듯이 기름을 넉넉하게 사용해서 부쳐낸 고소한 감자전과 농밀한 바질향이 썩 잘 어울렸다. 과감한 재료 사용이 놀라울 따름. 먹다 보니 뭔가 아쉽다 싶더니, 사워크림 한 종지만 있으면 딱 좋겠다 싶더라. 간장보단 그게 내 취향 ㅋ 생각보다 크고, 보기보다 감자도 두둑해서 좋긴 한데, 반값에 반만 팔면 좋겠다. 이것도 맛있지만, 다른 것도 먹고 싶어 (T^T) 다른 거 먹을 때도 이거 먹고 싶어.
Drinks 막걸리 - 희양산 14,000원. 곡향이 나면서 단맛이 거의 없는 막걸리. 술 좋아하시는 분들이 좋아하심. 소주 찾을 거면 드셔 보세요. 750㎖ 9도
기괴한 고양이부터 취향이 아닐 것 같은 기운이 마구 느껴졌었는데, 역시 쿰쿰하니 시큼한데 달지도 않아서 내 입엔 별로.
배가 불러도 먹을만한 안주가 뭐가 있을까 곰곰이 고심한 끝에 선택한 안주. 육회는 배 안 부르지.
Dishes 아이올리 타르타르 15,000원. 견과류, 올리브와 아이올리소스를 곁들인 육회
육회가 견과류, 올리브, 아이올리소스와 어울릴 줄이야... 이제껏 먹어본 육회 요리 중 가장 그럴싸했다. 뭉글뭉글 씹히는 육회와 올리브는 식감이 비슷해서 잘 어울렸고, 오독오독 씹히는 견과류는 또 완전히 달라서 잘 어울렸고, 고소하면서도 산뜻한 아이올리 소스는 그냥 잘 어울렸다. 치즈를 소복하게 갈아 곁들인 것도 마음에 든다. 이건 와인 안주로도 좋을 듯.
우리가 머무는 동안 우리 자리에는 세 종류의 샘플 막걸리가 다녀갔다.
샘플 1. 고타 다이브. 6도
분명 설명에는 과일향이 달달하고 부드럽다 했는데, 단맛이 강한 막걸리는 아니었다. 깔끔 산뜻한 팔팔막걸리를 마시던 중 시음한 탓인지 괜히 더 텁텁했다.
샘플 2. 딸기. 6도
샘플로 마셨던 막걸리 중 가장 우려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딸기막걸리. 딸기 사진이 삽입된 라벨이 지역방송 자체광고처럼 날 것의 느낌이 강했고, 애매한 분홍색도 괜히 꺼려졌었는데, 향부터 맛까지 딸기 뿜뿜이었다. 인공착향료로 맛을 낸 딸기맛우유 느낌이 아니라 새콤달콤 딸기의 특징을 제대로 잡아냈다. 샘플로 마신 세 가지 중 가장 마음에 들긴 했지만, 이걸 둘이서 한 병을 비우기엔 다소 부담스러웠다. 작은 병이나 잔으로 팔면 좋을 것 같다.
샘플 3. 선호. 6도
김포예주도 괜찮았고, 팔팔막걸리도 맛있어서 '난 김포 술 좋아하나 보다' 싶었는데, 꼭 그렇진 않은 모양. 단맛이 없는 탄산수 같은 막걸리라는데, 난 달지 않은 탄산수는 마시지 않는다. 아예 깔끔할 게 아니라면, 단 게 좋다.
네 번째 샘플 막걸리가 매장을 돌아다니기 시작할 즈음 우린 가게를 나서야 했다. 항상 그런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간 날은 40분에 1번 꼴로 샘플이 제공되었던 것 같다. 매장 이용시간이 2시간 반이니까 4번이 최대였을 것 같다. 더 자주 하면 시음주를 주문할 확률이 더 늘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는 너무 힘드려나?
대낮처럼 훤한 시간에 들어갔는데, 나올 땐 이미 캄캄한 밤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막걸리를 그 돈 주고 먹냐 할 테고, 나도 그런 생각이 전혀 없진 않지만, 이런 동네에 우리 술을 이렇게나 다채롭게 판매하는 주점이 있다는 것도, 그런 곳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것도 상당히 재밌고, 기분 좋은 일이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이런 유행은 조금만 더 천천히 사그라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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