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 파인픽스 에프 410. 나의 첫 디지털카메라이자, 당시 용돈을 모아 사본 중 가장 고가의 물건이었다. 똑딱이라는 말도 생경하던 시절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큰 마음을 먹었고, 덕분에 남들은 잘 갖고 있지 않은 그 시절 모습들을 비교적 나쁘지 않은 화질로 소장 중이다. 물론 지금 폰카보다도 훨씬 애매하고, 동영상은 CCTV 화질 보다도 못하지만, 그때 그 모습을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저 기기는 충분히 그 값을 하고도 남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친척으로부터 선물 받은 필름 자동카메라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시절 언젠가 학교에 들고 가서 친구들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무슨 포즈를 취하길 기다리기보단 그냥 들이대서 찍어 댄 바람에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포착해냈다. 지금도 인물 사진은 그런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이다. 지금이야 자연스런 모습을 사진에 담는 게 여러모로 부담스럽지 않을 수 있지만, 당시에 필름 카메라로 어찌 그리도 용감할 수 있었나 싶다. 뭐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대체 뭘 믿고 몇 방 되지도 않는 셔터를 과감히 눌러댔을까? 디카에 애착을 갖게 된 건 역시 찍었다 지우고 확인하고 간직하는 일련의 과정이 필름 사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간편하며, 경제적이기 때문이었다. 과거 우리 집에 잠시 머물렀던 복합기 덕에 앞서 언급한 사진들을 포함한 필름 사진 일부를 하드에 보관 중이긴 하지만, 인화했던 사진들의 대부분은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본가가 이사를 거듭하는 동안 사라지고 말았다. 어린 시절 사진이 제법 많은 편이었는데... 언젠가 어느 광고 카피가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사진이 없는 시절은 기억이 희미하다. 더 오래된 탓도 있겠지만, 사진을 보면 그 상황이 절로 곱씹어 지곤 하는데, 그러지 못하다 보니 더욱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메모하고, 기록하고, 무언가 모아두는 걸 즐겼는데, 그걸 가장 간편하고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게 사진이다. 이런 취향 덕에 다이어리질과 포스팅에 매진하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퍽 게을러져 버려서 사진만 숨 쉬듯이 찍어 대고 있다. 평소에도 걸음걸음 찍어대는 편이지만, 어디 사나흘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 천 장을 찍어오기도 한다. 덕분에 뭘 잘 사지도, 좀처럼 뭘 갖고 싶어 하지도 않는 나지만 외장하드랑 클라우드 용량 구매엔 지갑을 열고 만다.
내가 만져 본 첫번째 DSLR이자, 돼지군의 첫 카메라인 소니 알파 300. 한창 DSLR이 유행이던 시절보다 살짝 앞서 돼지군이 장만한 장비로, 틸트 액정이 킬포인 제품이었다. 미러리스가 아니라 무게도 제법 나갔고, 프리셋보단 직접 설정을 하나하나 만져야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기기라 "쉽고 빠르게 수시로 찍어서 마음에 드는 걸 건지자" 식의 사진 세계를 가진 내겐 어울리지 않았다. 놀기 위해서까지 공부를 하고 싶진 않았지만, 세상만사 삼라만상이 관심사인 돼지군 덕에 이것저것 주워 들어 버려서 내가 설명은 못해도 누가 뭐라 하면 얼추 알아듣는 정도는 된 것 같다. 이 시절 돼지군은 렌즈 욕심을 무럭무럭 키웠고, 사진 관련 강의도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즈음 사진들이 몇 년 뒤, 이따금씩은 요즘 찍은 사진보다도 퀄이 좋다. 역시 고생과 결과물의 질은 비례하려나. 이런 걸 볼 때마다 무거워도 사진기를 한 번씩 들고 다녀봐야겠다는 소리를 꺼내곤 하지만, 그걸 실천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동영상은 지금 폰카가 확실히 우월한 고지를 점하고 있을뿐더러, 사진마저 이미 적당한 똑딱이 정도는 구현이 되는데, 항상 손에 들고 있고, 사진기라고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가벼운 데다 이런저런 보정이나 활용도 즉각 할 수 있으니, 묵직한 사진기를 별도로 동행하는 게 번거로울 수밖에. 그래도 어플 보정만으로는 완벽히 구현할 수 없는, 그 커다란 렌즈로 조이고 풀어 만들어내는 느낌적인 느낌은, 멋모르는 내가 봐도 뭔가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또 카메라를 꺼내야지 하고 원점으로 복귀하는 그런 일련의 사고 과정은 항상 반복된다. 그래도 역시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사진기를 들고 거길 가야 한다"는 거라, 어쩌면 앞으로 폰카를 이길 수 있는 건 없을지도... 앞으로 10년 뒤엔 또 딴 소리를 하게 될까? 그건 그때 가서 주절거려 봐야겠다.
이상, 하드 털어 나온 옛날 사진기 얘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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