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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면부지 외국인에게 쪽지를 쓰다

雜談 주절/日常 살이

by 눈뜨 2010. 8. 19.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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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간만에 일찌감치 독서실에 엉덩이를 붙였다

9시가 넘은 시각, 누군가가 들어 와 자리를 잡고 앉더니
요란하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이제껏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격한 강도의 타이핑 소리와 진동에 흠칫 놀랐고
마침 물도 뜨러 가야하는 터라 나가면서 범인을 살폈다

그런데
머리가 좀 벗겨지고, 군데군데 흰 머리가 있는 것도 모자라
우리말 전혀 못할 것 같은 백인 아저씨가 열심히 노트북 작업을 하고 계시는 게 아닌가?!

어안이 벙벙해서, 물을 뜨며 '대체 뭔 일인가?'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방을 잘못 찾아 들어왔지 싶다
컴퓨터실로 가는 길에 독서실이 있는데, 환기를 위해 문을 열어 놓아서 아마도 여기려니 했는갑다

내가 관리자도 아니고, 대뜸 "나가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자리로 돌아 와서 추이를 살폈는데
누구도 선뜻 외국인에게 상황을 묻거나 설명하는 이가 없었고
본인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내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지라 자꾸 신경이 쓰였고,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가서 말을 걸어야 하나, 말을 걸면 뭐라고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한 끝에
독서실의 특권 필담(?)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쪽지 초안
영어 울렁증에 소심증까지 더해지니 쪽지 하나 써서 전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단어야 대충 쉬운 것만 골라서 썼으니 걱정 없는데, 과연 문법은 맞는 걸까
이런 쪽지에도 일일이 관사를 붙여 줘야 하는 건가
혹 무례한 표현은 아닐까 등등 걸리는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미묘하게 다른 몇 가지 버전의 쪽지들이 탄생했고


최종 결정된 녀석은 인석
move out의 어감을 잘 모르겠어서, 걍 빼 버렸다

이걸 다 쓰고 나서도 이걸 전달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전전긍긍하다가
'이런 것도 해결 못해서 쓰겠냐?!'는 생각에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복도 끝에 Internet Room이 있는 걸 다시 확인하고 돌아 와서
외국인 아저씨가 앉아 있는 책상을 두드리고 쪽지를 살포시 놓아 보여 드렸다

그러자 백인 아저씨는 잠시 쪽지를 보더니
당황하는 기색 없이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Sorry"를 날려주시고는
쿨하게 주섬주섬 짐을 챙겨 유유히 자리를 떠나셨다

이렇게 간단할 줄 알았으면 진작 전해 드릴껄
처음 쓴 쪽지를 그냥 드렸어도 이렇게 적당히 알아 듣고 기분 좋게(?) 나가셨을 것 같다
이 아저씨 전혀 당황하지 않아. 게다가 미안하다고는 하지만 쩔쩔 매는 분위기는 아니야
이게 동서양 사람의 차이인가

쪽지도 전하고, 아저씨도 기분 좋게 나가셨고, 독서실은 정적을 되찾았지만
나의 심장과 머릿속은 전혀 조용해지질 않았다

어쩐지 나만 바보된 기분이 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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