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에 술이 굉장히 자주 등장하지만, 놀랍게도 난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냥 내 입에 맛있는 걸 좋아해서, 특히 맥주는 대부분 안 좋아하고, 막걸리도 극히 일부만 괜찮아한다. 증류주도 맛이나 향이 날수록 싫어한다. 또 신 걸 못 먹어서 시큼 털털 와인도 안 좋아하는 게 많다. 내게 있어 맛있는 술의 제1덕목은 역시 단맛! 달면서도 진한 걸 좋아한다. 그래서 처음 포트와인을 먹어봤을 때, 드디어 "좋아한다"고 할만한 술이 생긴 기분이었다. 애주가 돼지군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주종 중 하나가 포트와인이다. 처음 포트와인을 먹어본 건 잠실의 라이언하트라는 바였다. 몰라서 이것저것 추천을 받아 술을 골랐는데, 그중에 살짝 끼어 있었던 것. 그렇게 거기 사장님 덕분에 입문했는데 "이걸 한 자리에서 병을 깐다"하니 혀를 내두르시더라. 왜? 맛있는데, 왜요?
을지로에 위치한 바420을 처음 알게 된 것도 포트와인을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을지로 보다는 종로라고 해야 하려나?
지도를 보며 찾아오긴 했는데, 입구가 영 낯설다. 몇 번 오는 동안 항상 공사 중이라 펜스가 둘러져 있었는데, 그걸 치우니 전혀 다른 데 같다. 다행히 엉성한 입간판이라도 세워져 있어서 골목을 지나치지 않을 수 있었다.
펜스가 있을 땐 답답했는데, 싹 걷고 나니 허전하다. 와인 병이 좁은 골목을 따라 쭉 늘어선 모습이 꽤나 너낌있긴 했었는데... 방수천으로 덮어놓은 건 뭐지? 어쨌든 옆 건물 공사가 끝나면서 공간이 생겨 외부에도 테이블이 생긴 듯했다. 피냐 콜라다 같은 거 쪽쪽 빨아야 할 것 같은 짚으로 엮은 휴양지 파라솔이 버티고 서있는데, 공간이나 가게 분위기랑 궤가 많이 다르지 않나? 차라리 평상을 두는 게 어울릴 것 같은데... 꼭 그늘이 필요하다면 그냥 캠핑용 그늘막이나 해수욕장 파라솔이 낫지 않을까? 날씨가 쨍하면 괜찮아 보이려나? 암튼 내 눈엔 애매해 보였다.
벽난로(?)에 쑤셔 박혀있던 콥케 병들도 종적을 감췄다. 출입문에 붙어있던 스티커도 싹 제거한 걸 보면, 이제 깔끔한 쪽으로 노선을 바꾼 걸지도...
지난번엔 손님이 꽉꽉이었는데, 우리가 갔을 땐 자리를 골라 앉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토요일 7시는 와인 마시기엔 이른 시간인가? 예약은 캐치테이블에서 가능한데, 널럴한 편. 아직 예약을 하고 가본 적은 없다. 들어갔을 땐 빈자리가 제법 있었지만, 머지않아 손님들로 가득 찼고, 머무는 내내 시끌벅적했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같은 중앙(?) 자리에 앉았다. 다른 자리도 있긴 했지만 퍽 소란스러운 편이라 둘이 얘기하기엔 나란히 앉는 게 낫다. 벽에 붙을 수 없을 바에야... 애매한 자리 중엔 여기가 베스트. 바로 옆에 물병이랑 냅킨도 있어서 물자조달이 용이한 것도 이 자리 장점 중 하나. 술 마실 땐 수분 공급이 중요하니까 ☆⌒(≧▽° )
포트와인에 빡 힘을 준 업장답게 포트와인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는 메뉴판. 포트와인은 포르투갈의 주정강화와인으로 브랜디를 첨가하고 숙성시켜 만드는데, 오크통에서 숙성을 하면 특유의 향이 밴다. 우디하기도 하고, 살짝 시나몬향 같은 게 감도는데, 난 그걸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에이지드 토니를 선호하는 편. 이번 방문의 목적은 이 페이지 가장 하단에 있는 "10년 숙성 샘플러"였다. 지난 바420 포스트 말미에서 먹어보겠다 다짐한 그것. 반년만에 실행에 옮겼다.
전과 비교해서 갖추고 있는 술 종류나 판매 방식(잔이나 하프보틀, 보틀 등)도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음식이었다.
푸드에 "포르투갈 전통 음식"이 생겼다. 전엔 이런저런 자잘한 안주를 파는 술집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바뀌니 포르투갈 음식 전문점 느낌이 되어 버렸다. 짜계치 귀여웠는데... 포르투갈 음식이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지만 식사를 할 건 아니라 이번엔 스킵. 다음에 먹어봐야지.
칵테일도 팔고 있었는데, 모두 포트와인을 넣고 만들었다기에 하나 먹어보기로 했다.
포트와인 술상. 많이 시킨 게 아닌데, 음료며 음식이며 모두 자잘 자잘해서 푸짐하게 차린 것처럼 보인다. 뒤에 데코로 둔 병들도 한몫하는 듯 ㅋ
Food - Cheese Platter 치즈 플래터 24,000원. 고다, 스모크, 과일 치즈, 브라운 치즈, 블루 치즈 등 각종 치즈들의 집합체 플래터
술집에서 치즈플래터를 주문하면 싸구려 견과류나 말린 과일, 과일치즈를 늘어놓아서 손이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애매한 구성으로 나오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정도면 알짜다. 맛이나 식감, 특색 등이 각기 다른 치즈들을 알차게 배치한 플래터. 말린 과일도 건포도나 크랜베리 정도 주는 게 예산데, 무화과라니... 과일 치즈도 막 인위적이거나 느끼하지 않고 적당히 산뜻하고 부드러워 먹기 좋았다. 크로플 위에서만 본 브라운 치즈도 이렇게 보니 반가웠는데, 달달하고 맛이 옅은 편이라 포트와인이랑은 잘 안 어울리더라. 포트와인엔 까망베르나 브리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강한 맛과 향에 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모크치즈도 제법 괜찮다.
Port Wine 포트와인 - 10 Years Sampler 10년 숙성 샘플러 30ml x 5잔 36,000원. 포트와인을 대표하는 10년 숙성 토니포트 5종. Tawny Port 10y - Kopke, Taylor's, Graham's, Valdouro, Para
Cocktail 칵테일 - Redmoon over Porto (feat. O.D.W) 레드문 오버 포르투 14,000원. 포르투 도루강에 떠 있는 붉은 달처럼 진하고 끈적한 버번과 포트와인의 금지된 사랑
오른쪽 온 더락 잔에 따로 담겨있는 게 칵테일, 레드문 오버 포르투. 버번과 포트와인이라기에 호기심이 동했는데, 확실히 포트와인은 포트와인만 마실 때가 가장 맛있다. 캐릭터가 워낙 강해서 무언가를 섞으면 어떻게 해도 싱거워지는 느낌이다. 포트와인은 찐한 게 매력인데 :q
여기 보이는 앙증맞은 다섯 잔이 포트와인 10년 숙성 샘플러. 각인된 문구를 보니 콥케 샘플러 트레이와 잔 세트인 모양이다. 브랜드 샘플러는 그라함이던데, 그라함 전용도 따로 있으려나? 나무 트레이에는 살짝 홈이 파여 있어서, 잔을 내려놓을 때 잘 올려 두어야 할 것 같다. 애매한 위치에 놓으려 하다간 엎어 버릴 수도... 그치만 홈 덕분에 잘 내려두기만 하면 살짝 건드려도 잔이 쓰러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서 좋더라. 사진에 보이는 바와 같이 각 잔 아래 테이프를 붙여 각 브랜드를 손글씨로 적어 놨다. 샘플러를 시켰을 때 잔 여러 개를 가져다주면서 말로만 설명하고 가버리면 나중에 헷갈리기도 하는데, 이건 내가 섞지만 않으면 끝까지 뭐가 뭔지 알 수 있어서 좋은 시스템. 훌륭합니다.
집중해서 홀짝거렸지만, 일단 어두워서 정확한 빛깔은 알 수 없었고, 맛도 커다란 특징이 같다 보니 명확한 분석은 쉽지 않았다. 먹다 보니 비슷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ㅎㅎ 그래도 멋대로 평을 해보자면, 생각보다 테일러가 별로였고, 즐겨 마시는 콥케는 무난했으며, 의외로 파라가 괜찮았다. 파라는 굉장히 낯선 이름이었는데, 호주 꺼란다. 호주에도 포트와인이 있었어? 처음 맛을 봤을 땐 너무 새큼해서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마시다 보니 가장 풍부하다 해야 하나? 비슷한 걸 계속 마셔서 특색 있는 게 가장 낫단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발도우로는 전에 별로였는데, 기억보단 괜찮아서 의아했다. 포트와인을 좋아하는 건 오크향과 진한 단맛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고도수임에도 알콜향이 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매력포인트 중 하나다. 숙성기간이 짧으면 알콜향이 함께 나는 경우가 있지만, 보통 10년쯤 되면 그러진 않더라. 전에 마셨던 발도우로가 애매했던 건 10년 숙성 포트임에도 불구하고 알콜취가 올라와서였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이날 기준으로는 파라와 콥케가 비슷하게 마음에 들었고, 테일러가 가장 별로였다. 그라함은 쏘쏘.
드디어 숙원사업이었던 포트와인 10년 샘플러 클리어 ヾ(@^∇^@)ノ 씐놘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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